요즘 블로그를 돌아다니면서 본, 은근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이택광의 글들에 대한 관람평

1.

나는 이런 이들을 대체로 '장기판 좌파'라고 부른다. 장기판에서 포를 써서 이기느냐, 차를 써서 이기느냐, 아니면 졸을 움직여 이기느냐, 같은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면서 '제몫'을 다하는 좌파들이 이에 해당한다. 진짜 좌파라면 장기판을 뒤집어버릴 궁리를 해야할텐데, 이 장기판 좌파들은 그 판을 뒤집겠다는 사람들을 말리기 바쁘다.<중략>

요즘 갑자기 쇄도하기 시작하는 칼 폴라니에 대한 칭송과 예찬을 보고 있으니 새삼스럽게 장기판 좌파의 폐해랄까, 이런 걸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중략>한국 래디컬리즘의 종언이랄까 이런 거 말이다. 장기판 뒤집는 얘기를 철 지난 노래로 듣기 시작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지만, 대충 여기에서 접겠다.

이택광, <장기판 좌파 >中

저 글을 보고 든 가장 먼저 든 의문:

이택광은 과연 폴라니를 읽어봤을까? 그리고 이른바 ‘장기판 좌파’ 경제학자들이 이야기한 사회적 경제라는 게 좌파적 대안에서 어떤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기는 하는 건가?

이택광이 ‘삘’을 받은 것은 한겨레21에서 나온 폴라니 관련 대담인 거 같은데, 그 대담에서 무서운 사실은 폴라니라는 단어를 빼도 전반적인 흐름에 하등의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우석훈, 정태인은 물론이고 석사 때 부터 폴라니를 주제로 파고든 홍기빈 마저도 실제 자본주의 어쩌고 말한 것은 폴라니를 빼고도 너무나 충분히 이야기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는 폴라니의 주된 연구가 ‘시장경제의 전면화’ 이전의 경제활동방식에 대한 회고적인 고찰이었다는 데서 비롯된다.즉 시장경제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논거를 구축하는 것이 주된 작업이란 이야기.최근 폴라니에 대한 ‘칭송과 예찬’은 다른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주된 기둥인 시장경제를 뒤흔들기 위한 레퍼런스 구축의 의미외엔 별다른게 없어 보인다. 한겨레가 호들갑 떠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어찌본다면 대공황이 발발한 지 80년이 지났고, 자본주의 시장질서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알고 지냈던 인간들에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라는 사회주의 태동기의 팩트를 전달해주기 위한 텍스트로 폴라니가 전유되는 것인바.

게다가 세 사람의 이야기는 좌파들이 모두 전통적으로 해왔던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이다.전혀 새로울 것도, 특별히 ‘장기판 좌파’의 대거등장이라고 볼 것도 없는 이야기.심지어 자본주의가 성립하던 시절부터 나오던 이야기들인데, 이를 ‘새로운 칭송과 예찬’으로 봐야하는 지 심히 의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이택광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래봤자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아니지 않나’, ‘자본주의 체제의 개량으로 끝나버리는 담론’이라는 접근인 듯하다.(텍스트가 워낙 난해하기에 그야말로 추측이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대체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할 것 인가의 문제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계산가능한 방정식의 합으로 경제를 보는 것은 저 사회주의 계산논쟁 시절에나 가능했던 좌파의 접근법인지라, 정말 골치아픈 문제다.엔지니어링에 비유하자면, 설계도를 작성해야 하는 데 엔진의 특성이나 소재 특성은 물론이고 어떤 환경에서 어떤 목적으로 이 기계를 돌릴 건지 전혀 모르는 상황.여기에 대해서는 현재 작동 중인 유사한 기계를 분석하고, 끓임없는 개량을 시도하며 이를 바탕으로 최선의 approximation을 하는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여러 대안들을 모색하고, 실제로 한 번씩 운영해보고 심지어 자본주의 제도라도 좋아보이는 건 한 번씩 어떻게 적용할 수 없을까 이런 경험을 어떻게든 쌓아올리고 지식으로 공유해야한다.너무나 당연히 지금 힘써 노력해야하는 문제를 ‘장기판을 뒤집을 궁리’를 하지 않는다하여 부정한다는 건 사실 좀 어이가 없다.

현재 좌파의 정치, 경제, 사회 전략이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실제 정치 과정에서 풀어나갈지 그 scheme을 고민하는 게 그 ‘장기판을 뒤집을 궁리’를 위해서는 중요하다.한국 좌파의 문제는 전략과 역량의 부재지 열정의 부재가 아니다.오히려 제대로 된 ‘장기판 좌파’가 부족한게 문젠데 이를 “장기판 뒤집는 얘기를 철 지난 노래로 듣기 시작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라고 읽으면 시대를 읽어도 단단히 잘 못읽은 것이다.

(이글을 쓰면서 8시간 노동제를 인터내셔널 정식 의제로 삼아야한다고 몸소 제안한 맑스와 소작농에게 토지재분배를 약속해 혁명을 승리로 이끈 레닌도 천상 ‘장기판 좌파’로 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2.
왜 앞에서 ‘장기판좌파‘에 대한 텍스트를 길게 이야기했느냐,

일종의 사회과학 특히 경제학에 대한 이택광의 시선과 인문학에 대한 옹호가 상당부분 겹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관찰한 결과, 한국 사회에서 ‘대안사회’에 대해 발언하는 대중적인 담론은 크게 두 가지 자장 아래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진화생물학의 자장이고, 둘째는 경제학의 자장이다. 이 둘은 대체로 ‘진보적인 담론’과 별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중략>

흥미로운 건, 너도 나도 ‘위기’를 외치고 있지만, 그 위기를 논하는 자리에 ‘인문학자들’이 초대받지 못하고 있는 기현상에 대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중략>

최근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칼 폴라니를 거론하는 이들도 ‘인문학자’이기도 했던 폴라니의 정체성을 ‘경제학자’라는 포장으로 덮기에 바쁠 뿐, 그 비슷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해온 인문학의 목소리에 그닥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는 않다. 신자유주의 이후 윤리와 도덕이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정작 이 문제를 핵심주제로 다루고 있는 인문학의 목소리는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셈이다.

이택광, ‘폴라니, 그리고 인문학의 개입’

폴라니 이야기로 시작했었으니, 이번에도 폴라니로 이야기를 끌어가보자.

우선 폴라니는 경제학자로 보기에는 애매한 사람이다.경제학의 계보에서 맑스보다 더 이탈했는데 그 까닭은 1.에서 서술한 그의 회고적인 연구 내용 탓이다.어떠한 이론 없이 그저 시장경제 이전에 대한 인류학적(또는 민속지적) 연구에 그쳤기 때문인데, 그래서 홍기빈 같은 이는 폴라니를 다룬 석사논문을 외교학과에 청구했었었다.(게다가 내용도 폴라니의 국제금본위제 비판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폴라니를 일군의 경제학자들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근대사회의 경제생활을 책임진 자유시장이라는 것이 역사적인 산물이었음을 다시 되새기기 위해서다.

이 부분은 사실 인문학자들이 진작 개척했어야하는 분야다.철학의 영역이기도 하고, 역사의 영역이기도 하며, 심지어 문학을 통해서도 접근 가능할 터다.그런데 인문학의 영역에서 여기에 대해서 제대로 된 담론을 구축해왔던 한국의 인문학 연구자가 과연 있는지 의문이다.오죽하면 좌파 경제학자들이 경제학설사의 창고 구석진 데에서 잠들어있던 폴라니를 끌어와야 하는지 여기에서 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게 오히려 적절하지 않을까.폴라니가 한국의 좌파 들에게 각광받는 게 대단히 특이한 현상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택광은 폴라니가 ‘인문학자’였다며 ‘경제학자’들이 이를 전유하는 데 대해서 불만을 표시할 뿐이다.그리고 “초대받지 못하고 있는 기현상에 대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개탄한다.

인문학이 초대받지 못하는 현상은 기현상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것에 가깝다.제대로 현실에 적용하는 성찰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악마의 멧돌’이 횡횡하는 현실에 대해서 제대로 된 비전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인문학자’들을 부르겠는가?

여기에 대해서 이택광은 “진화생물학과 경제학이 압도하는 대중적 진보담론의 지형도에서 인문학의 주요 관심사항인 주체나 윤리 또는 욕망의 문제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이택광이 한국 인문학계의 문제를 이야기하기는 한다.다음과 같이 말이다.

근대 인문학이 한국에 들어온 게 언제인데 여태 한국은 ‘세계적인 인문학자’를 갖지 못했다. 여기에서 세계적인 인문학자라는 건 외국에 알려진 학자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른바 한국의 토양에서 외국의 이론을 독창적으로 발아시킨 보편적인 학자가 없다는 말이다.  


즉 자기네가 레퍼런스를 삼을만한 독창적인 학자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시장경제의 역사특수성을 드러내는 작업이 그렇게 독창성을 요구하는 것인지 정말 의문이다.

‘독창적’이라는 말도 우습다.인문학 연구자가 독창적이어야지, 그럼 외국 학자들 논문 베끼는 데 급급하면 ‘연구자’라고 이야기할 수 가 있나?한국에서 각광받는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들을 보면 텍스트의 재해석에 기반한 것들이 상당히 많은데, 이것들은 다 뭐란 말인가?

진화생물학과 경제학이 압도한다는 대중적 진보담론이라는 현실 인식 자체도 문제다. 우선 진화생물학은 미국과 다르게 한국에서 전혀 힘을 못쓰고 있다. 경제학도 마찬가지. 사실 진보담론에서 경제학이 압도한다는 이야기는 진보담론의 구축이 경제학에 압도당해, 그 미시적 메커니즘을 광범위하게 적용한다는 이야기다. 1960~7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분석적 맑스주의 같은 것 말이다.오히려 한국에서 진보적 대중담론에서 경제학의 영향력은 낮다.오히려 이택광 같이 문화니 철학이니 문학이니 하면서 인문학에 몰두하는 좌파가 경제학에 기반한 좌파를 압도하는 게 1990년대 초반 이후 한국 좌파의 지형도에 가깝다.그나마 좌파 경제학자라 언급할 수 있는 정태인 우석훈 홍기빈 모두 진보세력의 아웃사이더에 가까운데 무슨 대중적 진보담론에 경제학이 압도한다는 이야긴지 모르겠다.

이택광은 다음과 같이 경제학이 진보적 대중담론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경제학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회의 주류 담론에서 중요한 건 자본주의 경제의 회복이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성찰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사회에서 경제학적 담론은 ‘이렇게 해야 경제가 산다’는 예언적 발화를 넘어가기 어렵다. 진화생물학이나 경제학이나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다분히 경쟁의 구도이고, ‘진보’나 ‘좌파’도 이 구도에서 정당한 능력이나 고유한 속성을 보여주면 수용 가능하다는 ‘실용주의’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생산의 구조, 또는 주체의 ‘훈육’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한, 한국 사회에서 현실의 문제에 밀착한 비판이나 대안은 요원할 것이다.

이택광, ‘폴라니, 그리고 인문학의 개입’

“자본주의 경제의 회복”과 “‘이렇게 해야 경제가 산다’는 예언적 발화“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르겠다.거시 경제지표의 회복과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자체의 수리 또는 갱생은 분명히 다른 문제다.이택광은 이 부분에서 혼동을 범하고 있것으로 보여진다.물론 시스템 결함을 수리하면 회복은 되긴 할 것이다. 그런데 그 결함을 폭로하는 작업을 깡그리 ‘회복에 도움되기 때문에 문제있음’이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저 ‘실용주의’는 오히려 한국 사회의 보수성에 대한 문제다.그 부분에서 이택광의 발언은 나름 적합하다.이를 ‘인문학이 죽어가는 환경’에 대한 것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그저 원론적인 주억거림에 그칠 뿐이다.

이택광은 한국 사회의 경제학 담론이 ‘적합한 성장 전략’을 보여주는 문제로만 국한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그런데 분명한 것은 경제학의 도구적 속성이다.경제학은 현실이 어떻게 되어야 정당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그 목표에 맞추어 어떻게 사회를 바꾸어야할 것인지에 대한 메커니즘 설계에 가깝다.좌파적인 경제학도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어떻게 현실적으로 작동가능한 대안을 만들어낼 것인지에 대한 의문에 답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한국적 상황에서, 언제나 좌파는 ‘실현불가능한 백일몽’으로 간주되어왔다.여기에 대해서 ‘실현가능하다’는 부분을 언급하는 것을 ‘문제’로 규정해야할까 아니면 ‘한계’로 인식해야할까.왜 좌파는 그렇게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소리만 찍찍하는 백면서생들로 인지되어오고 있는지 인문학이 대답을 해주었으면 좋겠다.제발 제대로된 지식생산의 구조와 훈육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서 말이다.

이택광의 경제학과 인문학에 대한 발화는 ‘경제학의 압도는 인문학을 고사시키고 있다’는데서 그친다.이는 단지 현재 대중의 보수성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에 그칠 뿐, 왜 좌파세력이 실현불가능한 대안으로 인지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생략돼있다.더욱이 이택광은 대중의 보수성의 근간을 이루는 ‘실용주의’와 ‘경제학’ 자체와 ‘진보적 경제학’ 3가지를 혼동하고 있다.폴라니에 대한 경제학자의 언급을 ‘실용주의’적인 행보와 연결짓는 코미디는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다.

3.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우생학’적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전반적으로 우생학=파시즘=실용주의 라는 등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결국 우수한 지도자가 우수한 국민을 만든다는 주장이고, 이런 지도자는 파시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북한의 수령론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북한이나 남한이나, 우생학은 세계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담론인 것 같다.

이택광, 박정희와 파시즘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서 우생학은 ‘우수한 지도자가 우수한 국민을 만든다는 주장’으로 배치된다. ‘인종적 우월성이 선천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믿는 관념‘이 박정희의 발언에 얼마나 녹아있나는 것을 우생학적 사고의 증거로 제시하면서 뜬금없이 저 지도자론을 들고와 파시즘과 연결하는 건 아무리봐도 무리수라고 밖엔 안보인다.

이부분에 대해서 김에녹시아, 한윤형, 김우재가 이미 일단의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확실한 것은 이택광의 글이 전혀 개념과 개념사이의 논리적 연결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명료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혀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개념이 어느정도 정의된 것도 아니고, 논리도 없고 그저 대비되는 두 생각을 문장 몇개로 이었을 뿐이다.이부분을 인문학적 방법론으로 변호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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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니 관련 언급을 보다가 급 필받아서 일필휘지 쓰고나니 분량만 늘었군.

엉망이 되는 글에 자주 발견되는 특징이 두가지 있다.

1.핵심적인 논지에 대해서 글쓴이 자신이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2.딱히 개념이나 논리구조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주제에 취해 어떻게든 말을 지어낸다.

이택광의 세 글에서 가장 크게 느낀 건 바로 이 두 가지다.

이게 왜 발생하게 되었느냐, 이후 이택광의 글을 추적하면서 바라보아야할 듯.

p.s. 우생학이니 사회생물학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사회진화론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인문학에서 사회진화론과 동아시아 근대성을 연결짓는 시도가 계속 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일언반구 언급없이 ‘인종적 우월성’을 주장했다는 것만으로 독일 파시즘과 연결짓는 걸 보니 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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